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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경성 인쇄노동자 파업 사건 (1928) — 민족과 노동이 맞닿은 현장

by skillplanner80 2025. 8. 13.

경성 인쇄노동자 파업 사건 (1928) — 민족과 노동이 맞닿은 현장

1. 서론 — ‘언론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분노

1928년, 일제강점기 조선의 수도 경성(현 서울)에서는 뜻밖의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그것도 언론과 출판의 중심, 인쇄소 노동자들이 주도한 대규모 집단행동이었습니다. 당시 인쇄노동자들은 신문과 책, 잡지를 제작하는 중요한 산업의 중추였지만, 그들의 삶은 참혹했습니다. 하루 12~14시간에 이르는 장시간 노동, 위험하고 비위생적인 작업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절반 이하의 임금이라는 구조적 차별이 일상화돼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임금 인상 요구가 아니라, 민족차별 철폐와 노동 조건 개선을 향한 집단적 각성의 표현이었습니다. 경성 인쇄노동자 파업 사건은 노동운동과 민족운동이 어떻게 연결되고 상호 보완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경성 인쇄노동자 파업 사건 (1928)


2. 시대적 배경 — 1920년대 후반 조선 사회와 노동운동의 흐름

1920년대는 조선 전역에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였습니다.

  • 경제 상황: 일본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조선을 값싼 원료 공급지이자 저임금 노동력의 창고로 만들었습니다. 인쇄업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일본 자본가들이 경성의 주요 인쇄소를 장악했습니다.
  • 노동 환경: 조선인 노동자들은 고된 업무와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노동자보다 승진과 숙련공 승급에서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 사회 분위기: 1926년 6·10만세운동, 1927년 신간회 창립,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은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의 결합을 촉진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언론과 출판의 현장에서 일하는 인쇄노동자들은 시대의 부조리를 가장 먼저, 가장 가까이서 목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인쇄업 구조와 노동자 현실

1928년 당시 경성의 인쇄업계는 신문사 부설 인쇄소, 대형 민간 인쇄소, 중소 규모의 독립 인쇄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작업 환경: 활자 주조, 조판, 인쇄, 제책 등 단계별로 나뉜 공정에서, 납가루와 잉크 냄새가 가득한 작업장에서 환기 장치는 거의 없었습니다.
  • 임금 차별: 일본인 숙련공 월급이 80100원인 반면, 조선인 숙련공은 4050원에 불과했습니다. 초급 노동자의 경우 20원 미만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 노동 시간: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주 6~7일 근무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신문 인쇄를 위해 야간 작업이 잦았고, 잔업 수당 지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차별과 착취가 누적되면서 불만은 점점 쌓여갔습니다.


4. 파업의 발단

1928년 봄, 경성의 모 신문사 부설 인쇄소에서 일본인 공장장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임금 삭감작업량 증대를 통보했습니다. 이는 이미 불만이 고조된 노동자들에게 ‘마지막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조선인 노동자 대표들은 공장장에게 항의하며 임금 원상 복귀 및 인상,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했지만, 사측은 이를 묵살했습니다.

이후 인쇄소 내 노동자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며 파업 계획이 구체화됐고, 이 움직임은 경성 시내 다른 인쇄소로 확산되었습니다.


5. 파업의 전개

1928년 5월 초, 경성의 4~5개 대형 인쇄소에서 일하던 수백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안을 내걸었습니다.

  1.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
  2. 하루 8시간 노동제 도입
  3. 작업 환경 개선 및 안전 설비 강화
  4. 단체교섭권 보장

파업 소식이 퍼지자, 경성의 다른 인쇄소와 제본소, 활자 주조소 등에서도 동조 파업이 이어졌습니다.


6. 일제 당국과 자본가의 대응

파업이 길어지고 인쇄물이 제때 공급되지 않자, 일본인 인쇄소주와 총독부는 강경 대응에 나섰습니다.

  • 경찰 투입: 경성부 경찰서와 헌병대가 인쇄소를 급습해 파업 지도부를 체포했습니다.
  • 언론 통제: 신문은 사건을 최소한으로 보도하거나, ‘불온한 파업’이라는 부정적 프레임을 씌웠습니다.
  • 경제적 압박: 파업 참여자 명단을 업계에 공유해 다른 인쇄소에 취업하지 못하도록 ‘블랙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7. 파업의 종결과 성과

수주간의 투쟁 끝에, 일부 인쇄소에서는 임금 10~15%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하루 10시간)**이 합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면적인 요구안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파업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집단 행동 능력을 확인시킨 사건이었으며, 이후 경성뿐 아니라 평양, 인천 등지의 인쇄노동자 투쟁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8. 참여자들의 증언

당시 파업에 참여했던 한 인쇄공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월급을 올리려던 게 아니오. 같은 일을 하고도 일본 놈들은 두 배를 받고, 우리는 절반만 받는 게 억울했지. 그게 나라를 빼앗긴 설움이었소.”

이 증언은 이 파업이 단순한 임금 투쟁을 넘어 민족차별 철폐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9. 사건의 의의와 영향

  • 노동운동의 성장: 이 사건은 조선 노동운동의 조직력과 투쟁 방식을 한층 성숙시켰습니다.
  • 민족운동과의 결합: 일본 자본가와 총독부의 탄압 구조에 맞선 투쟁이 민족운동과 직접 연결되었습니다.
  • 언론 자유와의 관계: 인쇄업의 특성상, 파업은 곧 언론과 출판의 마비로 이어졌고, 이는 당시 일본 당국에 큰 압박이 되었습니다.

10. 결론

1928년 경성 인쇄노동자 파업 사건은 노동자 계급의 권리 요구와 민족 해방 의지가 결합된 상징적 투쟁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날 노동 인권, 언론 자유, 차별 철폐를 이야기할 때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당시 노동자들이 보여준 용기와 연대는,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이어져야 할 가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