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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82

제주 예비검속 학살 사건 (1950년 6~8월)— 전쟁의 혼란 속에서 되풀이된 비극 제주 예비검속 학살 사건 (1950년 6~8월)— 전쟁의 혼란 속에서 되풀이된 비극1. 사건 개요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와 군·경 당국은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급속한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예비검속’**이라 불리는 대규모 민간인 구금 작전을 실시했다.이는 전시 상황에서 잠재적 ‘좌익 세력’이나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사전에 구금·처형함으로써 후방의 치안을 확보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법적 절차 없이 이뤄진 불법 체포와 즉결 처형이었다.제주도는 이미 1948년 4·3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상태였고, 당시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좌익 혐의자 명단이 작성되어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이 명단이 그대로 활용돼, 수천 명의 주민이 .. 2025. 8. 17.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1951) — 전쟁의 참극 속에 지워진 이름들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1951) — 전쟁의 참극 속에 지워진 이름들1. 서론 — ‘빨갱이’라는 낙인 속에서 사라진 생명들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경상남도 산청군·함양군·거창군 일대에서 국군과 경찰이 수백 명의 민간인을 ‘좌익 협조자’로 몰아 집단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다.당시 정부와 군은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토벌 작전을 벌였지만, 그 과정에서 무고한 노인, 여성, 어린이들까지 학살당했다.이 사건은 단순히 전쟁 중의 비극을 넘어, 국가권력에 의한 조직적 민간인 학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2. 사건 발생의 배경2-1. 6·25 전쟁과 남부 내륙의 빨치산 활동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한 이후, 경남 내륙 산악지대는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 중 하나였.. 2025. 8. 16.
노근리 사건 (1950년 7월) — 은폐된 비극, 드러난 진실 노근리 사건 (1950년 7월) — 은폐된 비극, 드러난 진실1. 사건 개요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 사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도교와 인근 쌍굴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경북 칠곡과 왜관 일대에서 피난하던 수백 명의 주민들이 미군의 공중·지상 공격을 받아 사망했으며, 희생자의 상당수는 무기를 들지 않은 노인, 여성, 어린이였다.이 사건은 50여 년간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1999년 미국 AP통신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한국 사회와 국제 사회 모두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전쟁 상황에서의 민간인 보호 문제를 환기시킨 대표적 사건이 되었다.2. 역사적 배경(1) 한국전쟁의 발발과 미군의 참전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소련제.. 2025. 8. 16.
거창 양민 학살 사건 (1951년 2월)— 전쟁의 비극 속에서 기록된 민간인의 피울음 거창 양민 학살 사건 (1951년 2월)— 전쟁의 비극 속에서 기록된 민간인의 피울음1. 사건 개요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소속 부대는 빨치산 토벌 작전을 수행한다는 명목 아래, 신원면의 주민 수백 명을 모아놓고 무차별적으로 사살했다.이 사건은 피해자의 대부분이 노인, 여성, 어린이였다는 점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피해의 참혹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당시 군 당국은 이들을 빨치산에 협조한 혐의로 몰았으나, 후일 조사 결과 상당수가 무고한 민간인이었음이 밝혀졌다.희생자는 약 719명(공식 기록 기준)으로 알려져 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1,000명에 육박한다는 증언도 있다.2. 역사적 배경2.1 한국전쟁의 양상과 빨치산 활동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 2025. 8. 16.
전남 신안 어민 해상시위 사건 (1936)— 바다 위에서 울려 퍼진 항일의 함성, 일본 어업 독점에 맞선 어민들의 투쟁 전남 신안 어민 해상시위 사건 (1936)— 바다 위에서 울려 퍼진 항일의 함성, 일본 어업 독점에 맞선 어민들의 투쟁1. 사건 개요1936년 전라남도 신안군 일대에서 벌어진 어민 해상시위는 일제강점기 조선 어민들이 바다에서 조직적으로 벌인 대규모 항일 투쟁이었다. 당시 일본인 어업회사가 남획을 일삼으며 어장을 독점했고, 조선인 어민들에게 불리한 가격으로 어획물을 강제로 매입하는 불공정 거래를 강요했다.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일본 어업회사의 행위가 단순한 상업적 횡포가 아니라 일본 제국의 식민지 경제 수탈 구조 속에서 철저히 보호받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어업권을 보장하고, 어민들의 저항을 ‘불온행위’로 규정하여 경찰력을 동원해 탄압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안군의 어민들은 오랜 기간.. 2025. 8. 15.
황해도 봉산 학생 동맹휴학 사건 (1927) — 조선 청년들이 던진 정의의 목소리 황해도 봉산 학생 동맹휴학 사건 (1927) — 조선 청년들이 던진 정의의 목소리1. 사건 개요1927년 황해도 봉산에 위치한 한 중등 교육기관에서 벌어진 학생 동맹휴학 사건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교육현장에서 벌어진 차별과 모욕에 맞선 청년들의 항거였습니다.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일본인 교사의 노골적인 조선인 비하 발언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이미 수년간 누적된 차별 교육, 조선어 억압,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교육정책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쌓여 있었습니다.이 사건은 단순한 학교 내 갈등이 아니라, 광주학생항일운동(1929) 이전에도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민족차별에 저항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2. 시대적 배경2-1. 1920년대 후반의 조선 교육 현실1920년대 후반, 조선은 .. 2025. 8. 15.